공회당때에 생겨난 영주극장
일제는 1919년 3.1운동 이후 지배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하는 가운데 지역사회에서 통제와 동원의 장소로서 공회당을 주요 도시별로 건설하였다. 그 가운데 경경선 공사 과정에서 성장해가던 영주가 1940년 읍으로 승격된 것을 기념하면서 공회당이 건립되었다.
또한 해방 전후 영주에서 건설업을 하였던 송시익은 그가 남긴 「내가 걸어온 영주반세기」(1978)라는 책을 통해서 공회당 건립문제는 당시 임업개발회사 영주출장소장 경전씨가 적송원목 만재를 무상으로 원조했고. 일본인 몇 사람과 한국인으로는 전병원씨가 출자해서 지금의 삼각지 분수대 서편 구 영주극장(공회당)을 연상(ㅎ淵上)씨가 시공해서 완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영주 발전의 상징이었던 공회당 건물을 빌려 영주극장이 운영되었다. 일제강점기 영화산업은 이 시기의 극장산업은 일제의 지배정책의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물론 1920년대까지 영화에서는 민족성을 담고 있는 것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나운규의 아리랑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1930년대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등 이른바 전시통제체제가 강화되면서 조선인들에 대한 통제와 동원을 위해 영화가 중요한 홍보수단이 되었다. 총독부에서 이를 위해 자금지원을 확대함으로써 영화의 품질도 좋아지고 극장도 많아졌다. 당시 극장에서는 영화 뿐 아니라 창극 등 공연도 진행하였고, 중요한 행사를 진행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영주의 유지로서 민족운동에도 적극 가담하였던 송상갑의 자제 정섭은 서울과 일본 등을 왕래하면서 접한 영화산업을 고향 영주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일본을 통해 영사기와 음향 기기 등을 도입하여 영화를 상영하였을 뿐 아니라 신파 악극도 공연하였다. 이 시기 극장 사정에서 대해 설립자의 아들인 송재승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해방되기 전에 대동아전쟁 중에 아마도 사람들 모이고 하면 폭격우려도, 통제도 어렵고 하니 일본인이 공회당을 폐쇄하고 불하를 받았다고 합디다. 우리 정섭어르신이 조부님에게 이걸 사주소, 극장할려니다. 그리했다네요. 그렇게 조부를 설득해서 논을 수십마지기 팔아서 영주극장을 해방 전에 개관 1943년이나 44년경으로 생각됩니다.
그 당시 일본인들도 구경 오고 조선인들도 오고 하는데, 이층이나 일층이 모두 방이 안되니 추워서 집에서 올 때 방석도 가지고 오고, 깡통에다가 숯불을 넣어 오는 거라. 그걸 앞에 두고 손을 녹여가면서 봤데요. 의자는 있었지. 나무 의자가. 1층 2층 모두, 공회당 시절 시설 그대로 이용했는데 나중에 극장으로 개조했지요.
그때는 연극도 하고 일본인들이 제작한 영화를 주로 보여 줬지, 전쟁 선전영화도 하고, 싱가폴 점령하는 장면 같은게 나오면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하는데 일본인들이 ‘반자이’(만세)라고 막 소리치는데 조선인들은 눈치만 봤다는 이야기도 들었지요.

해방 후 혼란기에는 영화 상영 뿐 아니라 각종 행사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영사기 등 주요 기기를 가지고 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전쟁 후 몇 년 동안 상이군인들이 극장을 점거하고 경영하였다. 1956년경에 설립자 집안에서 다시 경영권을 돌려받아 운영을 하였다.
당시 영주는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기존 중앙선 뿐 아니라 경북선, 영암선 등이 연결되면서 도시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를 연결하는 상업도시로 성장하는 가운데 경북의 중심 도시인 대구의 개봉관 극장과 비슷한 규모의 극장이 세워졌다. 1960년에 한윤범 등에 의해 영보극장이, 당시 영주의 3여걸 가운데 한분이었던 신재금이 1962년에 아카데미 극장을 신축하여 운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영주극장 또한 구성공원 남쪽 아카데미 극장 건너편 부지에 새로운 영주극장을 개관하게 된다.

1960년에 개관한 영보극장 (송재승 소장 자료)
1962년에 개관한 영주 아카데미 극장(사진으로 본 영주 백년사 수록)
이들 극장의 규모는 경북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었다. 신축한 영주극장은 객석이 1천석이 넘는 규모로서 대구의 개봉관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송재승은 1966년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극장을 운영하면서 1960-70년대 극장전성시대를 펼쳤다. 당시 영주극장은 선대의 장학 정신을 이어받아 영주 최초로 문화장학회를 설립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초중고 학생 20여명을 선발하여 각 5천 원씩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1968년 신축개관한 영주극장. 객석이 1037석으로 대구의 대형극장들을 제외하고는 경북에서 가장 큰 규모와 시설을 갖추었다.>(극장 사진 –송재승 소장자료)
풍기 또한 해방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이주민을 배경으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인견산업이 성장하였다. 당시 인견산업은 가내수공업단계로서 10대 여성노동자의 노동력을 배경으로 발달하였다. 이들 여성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종사하는 가운데 제대로 된 교육이나 여가생활을 할 수 없었다. 쉬는 날 기차를 타고 영주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여가생활이었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풍기에도 극장이 생겼다. 1959년 10월 30일 풍기극장이 개관하였다. 수용인원이 좌석과 입석을 합쳐 1천 명 정도의 규모라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풍기 극장 개관' 지난 5일에 착공한 풍기극장이 준공되어 30일 준공식과 아울러 개관하였다.
관주 엄두섭씨의 말에 의하면 수용인원은 1천명 이상이라 한다. 「조선일보」 1959년 11월 1일
풍기극장에서는 영화 뿐 아니라 지역의 각종 행사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개관 초기인 1959년 11월 10일에는 동장 30명과 방장 154명이 모여 ‘동방장지도대회’를 개최하고 추곡수납 등의 업무진행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러한 풍기극장이 호황을 누리자 1969년 6월에 동보극장이 개관되었다. 동보극장 규모 또한 8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당시로서는 대형극장이었다. 면단위 지역에 대형극장이 두 개나 개관되었다는 것은 당시의 풍기지역의 발전상을 나타나는 징표로서 지역의 수많은 여공들과 주민들이 풍기극장과 동보극장을 통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극장산업은 TV 수상기의 보급과 드라마로 인해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1972년 KBS 일일드라마 ‘여로’는 마을에서 TV를 가진 집으로 주민들을 모이게 했으며, 그로 인해 극장영업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시 극장들은 자구책으로 마지막 영화 상연시간을 여로 드라마가 마친 20분 후로 조정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197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던 영주지역의 극장은 1980년대 이후 지역사정의 변화 가운데 문을 닫게 되었고,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