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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선비도시 영주에서 ‘왕과 사는 남자’를 보지 않은 자의 사소한 이야기

송호상 교수 (동양대)

기사입력 2026-04-2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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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가 역사 인식을 주도하는 시대이다. 혹자는 미스터션사인이란 드라마를 통해 한말 일제 침략에 대한 양반가의 몰락과 의병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영웅이나 밀정 등의 영화를 통해 일제강점기 무장독립투쟁의 역사가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과거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은 왕과 그 주변 인물들이었다. 특히 여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2005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기존 왕의 여자 이야기가 아닌 남자. 그것도 하층 계급의 광대 이야기가 그렇게 큰 주목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역사학에서도 민중의 역사가 주요 연구대상이 되었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보통사람을 넘어 민주 시민, 인권, 여성문제 등을 다루는 작품들이 많아졌다.

영주는 선비도시라고 한다. 과거 수많은 선비 가운데서도 영주에서 이야기하는 선비는 안향과 정도전이 중심이다. 회헌 안향은 순흥사람으로서 고려말 원으로부터 성리학을 처음 가져온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성리학은 송대 농업기술의 발달을 배경으로 성장한 중소지주층들이 사대부로서 시대의 개혁과 더불어 기존 유학의 한계를 보완하고 우주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자 만든 사상이다. 이러한 성리학은 북송대를 거쳐 남송대 주희에 의해 체계화 되었다. 고려말에 안향 등에 의해 수용된 성리학은 송의 성리학이 원에서 변용되어진 상태의 것이었다. 이민족인 몽고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사상으로 활용되었던 성리학을 수용한 것이다.

안향이 수용한 성리학은 개경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서 안향이 최초로 성리학을 수용하였다는 논리가 부각되면서 안향의 출신지인 영주 순흥이 성리학의 발상지라는 상징석이 세워졌다. 성리학은 중국에서 등장한 사상인데 어떻게 순흥이 성리학의 발상지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비판이 일어나자 지역에서는 기존 문장 앞에 한국을 붙여 한국성리학의 발상지라고 고쳐 놓았다.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은 문장이다. 안향은 개경을 중심으로 학문활동을 전개하였고, 순흥은 그의 출신지로서 지역의 학자들도 성리학을 받아들여 수양했던 지역을 뿐이다.


여튼 이러한 성리학을 수용하여 부패해진 고려왕조를 개혁하고자 하였던 부류들이 신흥사대부들이었다. 그 가운데 영주 출신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더불어 부패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그리고 사대부의 나라를 꿈꾸었다. 이성계 또한 무장에서 국왕이 될 수 있었던 최고의 조력자로서 정도전을 신뢰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생각이 달랐다. 어찌 국왕이 사대부에게 끌려 다닐 수 있으랴. 나라의 주인은 오로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왕권중심의 국가를 꿈꾸었다. 이방원은 자신의 꿈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그토록 의지하고 믿었던 개국공신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정도전을 죽이고, 왕위에 있던 형님마저 압박하여 왕위를 물려 받았던 것이다. 이후 왕권을 지키기 위해 왕이 되는 과정에서 도움을 받았던 장인과 처남, 그리고 부인 마저 죽이거나 내쳐버리는 비정한 일을 자행하였다. 이를 보고 자란 왕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알다시피 태종의 대를 이은 것은 셋째 왕자였다. 우리가 성군이라고 부르는 그 세종은 아버지의 정치를 교훈삼아 훌륭한 재상들과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민본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군들에게도 역할을 부여하여 정치와 군사, 학문적 소양을 갖게 하였다. 이른바 왕조의 때 이른 절정을 맛본 시기였다.

그러나 일찍이 군주로서 자질을 쌓아오는 가운데 즉위한 문종이 병으로 재위 2년만에 승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어린 단종이 대를 이었다. 선왕의 유언대로 집현전 출신 관료들이 왕을 도와 정치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이 못마땅한 인물이 있었다. 수양대군이다. 원래 대군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아버지 세종의 배려로 정치를 경험한 수양은 조부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왕이 나라를 주관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을 부채질하는 자들이 수양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린 조카 단종을 물러나게 하고 왕이 될 것을 권유하였다. 마침내 수양은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어 자신이 직접 왕이 되고자 반대파들을 제거하면서 어린 조카를 겁박하여 마침내 국왕이 되었다. 왕이 된 수양은 왕으로서의 제대로 된 도리를 하고 싶었다. 비록 겁박하여 몰아내기는 하였으나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다른 왕족들에게도 후한 대접을 하였다.

그러나 쫓겨난 단종과 그의 추종세력이 살아 있는 한 자신도 쫓겨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쌓여 가는 가운데 수양을 도와 권력을 장악하였던 이른바 훈구파 관료들이 단종을 제거해야만 세조의 왕위가 보전될 것이라는 논리로서 세조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불어 사육신과 금성대군에 의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기회로 세조는 마침내 반대파들을 무참히 죽였다. 동생인 금성대군도 조카인 단종도, 그들을 추종한 사대부들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고 천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금성대군의 귀양처였던 순흥의 백성들 수백명이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그저 순흥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영월에서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둔 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로 부활했다. 억울하게 죽은 왕의 시신을 돌본 정성이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런데 정도전이 살아 있었다면 왕실 내부 권력다툼 끝에 친족들을 죽이고 몰락시키는 이 비정한 사건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억울한 죽임을 당한 순흥 사람들의 후손들은 금성대군과 단종을 추념할까? 금성대군의 을 강조하면 세조와 그의 대를 이어간 조선 왕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선비를 강조하는 영주에서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를 보려니 생각이 많아진다, 보지 못할 듯하다. 아마도 다가오는 어느 해 명절 특선영화시간에서 방영하면 보게 되지 않을까.

 

 

영주인터넷방송 박태완 기자 (iybc365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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