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삼정은 한일합방 국치년이던 1910년 5월 25일, 평안남도 평양부 창전리 163번지에서 만석꾼 수안(遂安) 계석홍과 어머니 남양 홍씨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광산 사업과 소금 사업을 하는 등 부유한 집안을 일구었다. 계삼정은 10세까지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눈을 떠 뒤늦게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입학할 당시 대홍수라는 천재지변을 당해 농토는 물론, 대동강가에 산적해 놓은 뗏목과 소금이 일시에 유실되어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더니 계삼정이 고보를 다닐 때는 극도로 곤궁해졌다고 한다.
1927년, 늦게 <종로보통학교>를 졸업한 계삼정은 사학 명문 <광성고등보통학교>를 노크했다. 미술공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 계삼정은 당시 계명칠(桂命七)이란 이름을 썼다.
계삼정이 개명을 한 시점이 언제였을까? 광성중 제자인 김창열과 숭인상업학교 제자인 강원채(후에 대구시장)의 회고를 통해 대략 1940년에서 ‘42년 사이쯤 개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계삼정은 3학년 때인 1930년,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전조선남여학생미술전람회‘에서 「풍경」으로 도화부문 3등상을 수상하였다.
계삼정은 사립 명문 광성고보 미술반원으로 자부심을 갖고 활동했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각 학교마다 미술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습니다. 매년 대규모 교내 전람회가 열릴 때면 평양 유지들이 와서 구경하는 등 성황을 이뤘지요. 그때 미술반 학생들이 평양 중심의 ‘서부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주최의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는 학교마다 경쟁이라도 하듯 입상도 하고 그랬지요.”
4학년 때 제11회 ’조선미전‘(1931)에서 인물화 「좌상」으로 첫 입선하며 당당히 화단에 발을 내디뎠으며, 1933년 3월에 화려했던 학창 시절을 마무리했다.
계삼정은 고보를 졸업하자마자 서양화를 공부하기 위해 동갑내기 박영선(평양고보)과 함께 일본 유학. 가와바타화학교(川端画学校) 나란히 입학. 계삼정은 재학 도중 결혼. 박영선은 ’36년에 졸업을 했지만, 계삼정은 1년 만에 니혼(日本)대학으로 옮기는 바람에 박영선보다 졸업이 한해 늦은 1937년 7월에 졸업.
계삼정은 귀국하자마자 평양의 <숭인상업학교> 미술강사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듬해 8월부터는 모교인 <광성고보> 교사로 부임하여 겸무를 했다. 계삼정이 모교인 <광성고보>에 임용된 것은 1938년, 음악과 권태호(1903~1972 안동, 1931-1938 근무)의 퇴임에 따른 것이었다.
계삼정은 교단을 그만둔 뒤 4개월 만에 해방을 맞고 그해 12월(혹은 익년 1월) 서울로 이주했다. 이주 상황에 대해 금계중학교 개교 40주년을 기념해 발간된 『금계』 창간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해 두고 있다. ‘1946년 선생은 형 치정씨와 함께 홀로 되신 어머님을 모시고, 딸 4형제가 딸린 가족을 데리고 자유를 찾아 서울로 월남했다.
계삼정은 서울에서 교직 자리를 얻지 못했는지, 1948년 10월까지 제자가 운영하던 서울유정공업기계회사 소장으로 취업하여 남한에서의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계삼정은 이후 풍기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좌우익 간의 사상투쟁이 극심했던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하곤 정감록의 제1승지인 풍기를 떠올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풍기에서 부인이 노변 행상, 보따리 행상으로 겨우 가계를 꾸려나가는 동안에도 계삼정은 교육자로서의 본성을 재가동했다. 더군다나 계삼정이 터를 잡자 찾아드는 친인척 때문에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 부인과 사별하고, 어느 시기 재혼을 했다.
‘50년 1월 20일, 마침내 마을 공회당을 빌려 호롱불을 밝히고 야학을 개설했고 ’51년 7월 25일, 결국엔 <금계고등공민학교> 설립인가를 따냈다. 그러나, 전시 상황 중에 군 작전상 교사가 헐리고,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에 의해 책걸상이 모두 없어지는 난관도 겪어야만 했다.
1952 부석사 소풍 기념. 강원채 장군, 계삼정 교장
그럼에도 ’52년 12월 29일, 마침내 금계학원 설립인가를 받게 되었으며, ‘53년 3월 14일, 3학급의 <금계중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이듬해 3월 14일, 첫 졸업식을 거행한 이후 학생들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실은 부족하고, 교사 초빙조차 할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풍기에 주둔하던 부대장 강원채가 계삼정을 찾아왔다. 강원채의 도움으로 교실 5칸을 신축하게 됐다. 강원채는 후일 대구시장이 되었을 적에도 학교림 107정보를 구입하는데 결정적인 지원을 해주며 사제 간의 정을 돈독히 했다.
계삼정은 그림을 판 돈을 부족한 학교 경영자금에 보탰으니 화업 또한 교육사업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59년 12월, 첫 개인전을 서울 중앙공보관에서 열었다. 작품은 모두 28점으로 인물, 풍경, 정물 등이 고루 분포되었다.
유화풍기 등두들(동양대 자리) 화판에
특히 「희방사」, 「희방폭포」 등 구체적 지명이 적시된 작품들도 여러 점이었다. 남쪽으로 넘어올 때 북한에서 제작했던 작품들은 거의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으니, 대부분 풍기에서 제작한 작품들이었다.

피난길(40x31)
’61년에는 두 번째 전시회(12.25~1962.1.5. 영주치과 2층 영보다방)를 영주에서 개최했다. 이때도 서문은 박영선이 맡았다. 전반부는 예전 서문과 같으나 후반부엔 영주 대홍수의 피해를 언급하며 영주군민의 정신적 위로가 될 전시에 대해 격려와 치사를 드린다고 되어 있다. 이두식(1947~2013 영주)은 중학교 때 계삼정이 그린 손 드로잉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전시회를 보고 그런 소회를 피력했던 것 같다.... 다음편에 계속

계삼정

금계 88x163cm (10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