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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칼럼]② 영주 최초의 모더니스트, 목부(牧夫) 권진호를 만나다

고향의 교정에서 절치부심한 유화의 불꽃

기사입력 2026-06-1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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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교정에서 절치부심한 유화의 불꽃

화가의 길을 걷기 위해 교직으로 진로를 바꿀 만큼 그림에 심취했던 권진호는 훈도 자격증을 취득한 후, 1936년 고향인 부석공립보통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화려한 도시의 화단에서 벗어나 고향 영주로 돌아오면서 그는 대구 화단의 기억 속에서 일시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단과 격리된 상황은 그에게 또 다른 절치부심의 기회였다. 방학이면 한 달 내내 화구를 싸 들고 산야를 누볐고, 예술적 영감을 위해서라면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방안에 걸터앉아 누드화 제작에 몰두할 만큼 그의 열정은 치열했다.
 


소한 (1939  조선미전 입선작 )


1937년 순흥공립보통학교로 전근한 그는 1940년대 초까지 근무하며 본격적으로 유화(유채)의 세계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화구를 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는 학창 시절 깊게 다루지 못했던 유화의 수정과 가필 특성을 활용해 대형 인물화에 과감히 도전했다. 풍금을 배경으로 그린 소녀연작들은 제작 장소가 바로 학교 교실이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그가 그린 인물들의 모델은 그가 무척이나 아꼈던 질녀 '재순'으로 추정되는데, 1942년작 모자를 쓴 소녀에서 보이는 특유의 얼굴 형태와 표정의 유사성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작품은 한때 옥대초등학교 교무실에 걸려 있다가 나무 난로 그을음 등으로 관리가 어려워지자 둘째 아들 권오규가 회수하기도 했다.
 


소녀(1942년작 국립현대미술관  기증)

 

영주의 흙먼지 속에서 피워낸 유화의 불꽃은 화단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1939년 제18회 조선미전에서 유화 소한(小閑)이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화가로서의 존재감을 다시금 각인시켰다. 이 작품의 도록 기록을 통해 그의 호가 '목부(牧夫)'라는 사실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 심사위원 심형구는 "변화성이 필요하다"는 짧은 충고를 남겼으나, 이듬해인 1940년 유화 손거울로 연속 입선하자 "묘사 태도에 있어서 찬의(贊意)를 표한다"며 그의 진일보한 기량을 인정했다.

 

손거울(1940 19회 조선미전 입선작)
 

권진호의 집념은 서양화적인 양감과 구조를 확보하며 더욱 성숙해졌다. 1941년 제20회 조선미전에서 인물화 춘정(春情)으로 입선한 데 이어, 1942년 제21회 전람회에서는 춘일(春日)로 출품하여 총 5번의 입선 중 4연속 입선이라는 저력을 이어갔다. 비록 1942년 전람회에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창씨개명인 '동호일(東浩一)'이라는 이름으로 출품해야 했던 시대의 아픔이 얼룩져 있고, 주소지가 경주로 오기되는 등 혼선을 빚었으나 그의 예술혼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1943년작 분홍저고리를 입은 소녀'호일점(浩一点)'으로 사인하면서도, 캔버스 뒷면에 본명인 '진호'를 적은 쪽지를 몰래 붙여둔 행위는 암흑 같은 시대를 건너면서도 끝내 지키고자 했던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액자 뒤에 숨겨진 진심, 우리가 기억해야 할 유산

해방 후 권진호는 창락국민학교와 단산 옥대국민학교의 2대 교장으로 부임하며 교육자이자 화가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이 시기 그는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 하에서 발전해 온 서양화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현대적 수묵화를 시도했다. 기축년 새해(1949)에 남긴 8폭 병풍은 마분지와 수채화 물감을 사용하면서도 사군자와 함께 '평화(平和)', '희망(希望)', '추일(秋日)', '화류(花柳)'라는 화제를 달아 해방 공간의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작가가 품었던 시대적 염원을 목가적인 필치로 담아냈다. 특히 사군자 중 국화를 화병에 꽂힌 정물 식으로 표현한 것은 서양화에 대한 의도성을 드러낸 대목이다.

그러나 그의 치열했던 예술 세계는 1951,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초연히 막을 내렸다. 그리고 남겨진 작품들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함께 혹독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네모난 통을 만들어 그림을 보호하며 피난길에 오를 만큼 작품을 아꼈고, 옥대초등학교 주둔 부대장이 그림을 달라고 했을 때도 기지를 발휘해 지켜냈던 그였으나, 사후의 관리는 지난했다. 그가 떠난 후 둘둘 말린 채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그림들은 1984년 아내 금필교 여사가 작고한 후에야 자녀들(오길, 오규, 오준, 설희)에게 분산되어 전해졌다. 더구나 1954, 둘째 아들 권오규가 중학교 1학년이었을 무렵 영주중학교 미술 교사 이동수의 주선으로 영주중부국민학교(현 영주중앙초) 강당에서 열린 유작전 이후, 전시된 수많은 작품이 제대로 회수되지 못하고 대부분 산일(散失)해 버리는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한때 영주 구 역전 앞 '삼일다방'에 걸려 있던 50호 크기의 폭포 유화처럼, 그의 숨결이 닿은 작품들은 지역의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위대했다. 지난 2022년 영주에서 열린 '권진호 유작전' 당시, 낡은 액자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기적 같은 발견이 있었다. 4학년 시절의 수작 닭장이 있는 풍경(1933)의 액자를 해체하자, 뒷면과 그림받이 화판에서 또 다른 그림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한 액자 속에 무려 3점의 그림(걸어가는 여인, 농촌)이 숨겨져 있던 이 놀라운 사건은 가난과 재료 부족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의 눈물겨운 집념을 대변한다. 또한 영주 시절 그린 대표작 정물(1937)은 어둡고 둔탁한 색조 속에서도 뛰어난 완성미를 보여주며 도화교과서적 배치와 손일봉의 영향 등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꼽힌다.

1976
, 둘째 아들 권오규가 대구의 한 전시장에서 우연히 뱉은 혼잣말이 계기가 되어 대구농림 동문인 강홍철과 평론가 권원순 등에게 재발견된 권진호. 그의 완숙기를 증명하는 1942년작 소녀는 열악한 상태 속에서 응급 수복을 거쳐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고, 또 다른 대작 두 여인은 대구미술관에 소장되었다. 과거 유족들은 부친의 전작을 고향인 영주시에 기증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성사되지 못했다. 영주가 낳은 위대한 모더니스트 권진호의 흩어진 파편들을 모으고 그의 온전한 유작들이 공공의 영역으로 수렴되어, 캔버스 뒤에 숨겨진 진심이 영원한 문화적 자산으로 빛나기를 기대한다.

 

송재진 즈음갤러리 관장 (iybc365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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