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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인물사]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 했던 월봉(月峰) 김계원 총장 기념관을 찾아

육군참모총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월봉(月峯) 김계원(金桂元, 1923~2016) 총장의 기념관

기사입력 2026-08-1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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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온몸으로 지나온 한 인물이, 태어난 고향 풍기에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 육군참모총장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월봉(月峯) 김계원(金桂元, 1923~2016) 총장의 기념관이다.

 


기념관 건립을 주도한 이는 김 총장의 조카인 김병호 경북항공고등학교 이사장의 제안에 김 총장의 장남인 김병덕 (주)기화산업 회장의 지원으로 순수하게 후손의 뜻과 정성으로 이 공간을 세웠다. 한 시대를 살아낸 어른의 삶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는 후손의 마음이 기념관 곳곳에 배어 있다.

 


김계원 총장은 1923년 영주 풍기에서 개신교 집안 4남 1녀의 장남이자 종손으로 태어났다. 기념관에서는 그가 태어난 생가 터가 지척으로 내려다보인다. 김 이사장은 창밖을 가리키며 "큰아버님이 태어나신 곳이 바로 저기"라고 소개했다.

배재고를 거쳐 1942년 연희전문학교 상학과에 입학했으나 일제의 학병제로 강제 징집됐고, 해방 후 1946년 군사영어학교 1기로 대한민국 육군 소위에 임관했다. 건군 1세대로 출발한 그는 육군대학 총장을 거쳐 1966년 육군참모총장에 올랐고, 1969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장, 주중화민국(대만) 대사를 지냈으며 1978년 12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돼 이듬해 10·26의 현장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 됐다. 2016년 12월 향년 93세로 별세해 고향인 봉현면 오현리 선산에 부인 서봉선 여사와 합장됐다.

 

기념관 건립을 제안한 김병호 항공고등학교 이사장(김계원 총장 조카)
 

김 이사장은 큰아버지를 "아주 효자셨다"고 회고했다. 참모총장의 별을 달고도 고향과 가족을 잊지 않았던 모습을 아직도 인상깊게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참모총장 재직 시절 부하들이 감사의 뜻으로 제작한 김 총장의 흉상


기념관에 들어서면 김 총장의 흉상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참모총장 재직 시절 부하들이 감사의 뜻을 담아 제작해 준 것이라고 한다. 전시 공간에는 생전 풍기를 찾아 지역 행사에 참석했던 사진들, 1960년대 서울 중앙청 시절을 담은 자료, 생활 유품 등이 자리하고 있다.

 

월봉 김계원 총장 기념관 내부


 

 

김 이사장은 "이사를 다니면서 많은 유품이 없어졌다"며 아쉬움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남은 것들이 다 보물"이라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더 챙겨 모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김 총장이 남긴 자서전이 있다고 소개해, 향후 기념관 전시가 한층 풍부해질 가능성도 열어뒀다. 밖에서 기록된 역사와 본인이 바라본 삶의 여정이 다를 수 있기에, 자서전은 김계원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귀중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인물의 공간이 대개 관(官)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달리, 이 기념관은 후손이 스스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영욕을 함께 겪은 큰아버지의 삶을, 조카는 미화도 외면도 아닌 '기억'의 방식으로 남기고자 함이 잘 드러나 있었다.

 

식민지 청년, 시대에 진로를 빼앗기다

 

한 사람의 이력서가 국가의 연표와 겹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월봉(月峯) 김계원(金桂元, 1923~2016)의 생애가 그렇다. 식민지 학병, 해방, 건군, 6·25, 산업화, 그리고 10·26까지. 풍기에서 태어나 소백산 자락에 잠들기까지 93년, 그의 삶에는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변곡점이 새겨져 있다.


 


김계원은 1923년 6월 28일 영주군 풍기면에서 개신교 집안 4남 1녀의 장남이자 종손으로 태어났다. 선대는 평안남도 대동군 출신으로, 1894년 남쪽으로 내려와 풍기에 뿌리를 내렸다고 그의 묘비문에 새겨져 있다. 배재고를 졸업하고 1942년 연희전문학교 상학과에 입학한 청년의 앞날은, 그러나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일제가 학병제를 시행하면서 강제 징집됐고,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를 거쳐 견습사관으로 복무해야 했다. 식민지의 청년에게 진로를 선택할 자유는 없었다. 시대가 대신 결정했다.
 

 

1945년 해방은 그에게 두 번째 인생의 문을 열어줬다. 귀국한 그는 이듬해 군사영어학교 1기로 대한민국 육군 소위에 임관한다. 이제 막 태어난 나라, 이제 막 만들어지는 군대의 출발선에 선 건군 1세대였다.

 

건군에서 참모총장까지, 군과 함께 성장하다

 

이후 그의 이력은 대한민국 국군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 한다. 6·25 전쟁을 치렀고, 사단장을 거쳐 1957년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맡아 방첩부대 창설 등의 성과를 냈다. 1960년에는 육군대학 총장에 올랐는데, 이때 부총장이 훗날 그의 운명과 얽히게 되는 김재규였다. 1966년 육군참모총장으로 군의 정점에 섰고, 1969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창군에서 군 현대화까지, 23년 군인의 길이었다.

 

예편 직후의 일화는 그와 고향의 인연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군복을 벗은 그는 부인 서봉선 여사와 함께 고향으로 기차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영주역에서 열차가 멈춰 섰고, 역장이 객실을 돌며 '김계원 장군님'을 찾았다. 중앙정보부장 임명을 알리는 청와대의 부름이었다. 인생의 갈림길마다 고향이 함께한 셈이다.

 

권력의 한복판에서 지킨 절제

 

중앙정보부장 시절의 그는 이례적인 평가를 받는다. 강권 통치의 시대, 무소불위의 권력기관 수장이면서도 불필요한 폭력을 자제했고, 야당 인사들은 그를 '남산골 샌님'이라 불렀다. 절반은 놀림이었을지언정 절반은 인정이었다. 힘의 자리에서 품위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는 이들의 표현이었다.
 

 


 



1970년 말 정보부장에서 물러난 그는 1971년부터 8년간 주중화민국(대만) 대사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978년 12월,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며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운명의 자리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10·26, 역사가 개인에게 지운 무게

 

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만찬장. 김계원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의 현장에 있었다. 총성이 멎은 뒤 대통령을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한 이도 그였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은 곧 시련이 됐다. 보안사로 압송돼 조사를 받았고,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예비역 육군 대장이던 그는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고, 1988년 특별사면 복권됐다. 명예는 회복됐으나 잃어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시대의 무게는 너무 무거웠다.

 

다시, 소백산 자락으로

 

만년의 그는 창군동우회 회장 등을 맡으며 조용히 지냈다. 2016년 12월 3일,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난 그가 돌아온 곳은 서울의 국립묘지가 아니라 고향, 영주시 봉현면 오현리의 선산이었다. 부인 서봉선 여사와 합장된 그의 묘는 소백산 자락을 바라보고 있다.
 


 

기념관 인근에 김 총장의 태어난곳과 부인과 함께 합장 된 묘가 자리하고 있어 기념관에서 두 곳이 다 보인다.


풍기에서 태어나 서울과 타이베이를 거쳐 다시 영주로. 생의 시작과 끝이 모두 이 땅인 김 장군. 시대의 시련을 한 몸에 겪으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그의 삶은, 역사란 교과서 속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웃의 생애 속에 흐르는 것임을 말해준다. 영주가 그를 기억해야 할 이유다.

더영주 김소영 기자 (iybc365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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