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엄마로, 며느리로, 아내로 사느라 어느새 ‘나’라는 존재는 잊혀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마당에서만큼은 체면도, 나이도 내려놓고 어린 시절처럼 마음껏 소리 내어 웃습니다.”
지난 9월 19일 경북전문대학 148아트스퀘어, 화려한 분장과 다채로운 한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무대 뒤에서 마지막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경상북도가 주최하고 경북문화재단과 경북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주관, 영주의 문화예술교육단체 ‘극단 어울림(대표 최경희)’이 운영한 신중년 마당놀이 ‘마당나온 선비’가 뜨거운 박수 속에 막을 올렸다.
2024년 ‘그녀들의 식치(食治)컬’, 2025년 ‘그녀들의 생생열전’(덴동어미화전가 바탕)에 이어 올해로 7년 차를 맞은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이다.
영주라는 유서 깊은 고장의 정체성인 ‘선비’를 오늘날 일상 속 이야기로 재해석해, 중년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치유와 회복의 과정로 만들어진 결과물을 무대 위에 올려놓았다.
연극이라고 하면 흔히 배우의 뛰어난 기량이나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극단 어울림이 추구하는 문화예술교육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1985년부터 배우와 연출가로 활동하며 40여 년간 연극 외길을 걸어온 최경희 대표는 “우리 또래 중년들은 평생을 가족과 사회를 위해 헌신하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문득 ‘온전한 내 모습’을 잃어버리곤 한다”며 “교육 연극은 완벽한 공연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억눌렸던 슬픔과 기쁨을 꺼내 서로 공감하고 치유하는 ‘과정 중심’의 치유 프로그램”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훈련 과정은 거창한 연기 레슨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주강사를 맡은 윤현주 강사는 참여자들이 낯섦과 쑥스러움을 허물 수 있도록 몸놀이와 게임, 무언극 등을 적극 활용한다고 전했다.
“처음 오신 일반인들에게 남들 앞에 서서 말하고 몸을 쓰는 일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추억의 놀이부터 동물을 몸으로 흉내 내는 퀴즈까지, 편안하게 웃고 뛰놀며 마음의 벽을 허무는 단계부터 시작했죠. 그렇게 굳어있던 몸과 마음이 풀리면서 어릴 적 이야기, 가족 이야기, 살아온 인생사가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고, 그 진솔한 고백들이 모여 한 편의 생생한 대본이 되었습니다.”
무대 위 참여자들의 표정에는 생기와 열정이 가득했다.
이번 작품에서 대감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 이명화 연기자는 첫 공연을 앞두고 설렘과 벅찬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학창 시절 이후 직장과 가정에 얽매여 나를 돌아볼 틈조차 없이 살았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20여 회의 연습 시간 동안 오롯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할 수 있어 매 순간이 치유의 시간이었어요. 이런 좋은 배움과 성장의 기회가 영주에 더 널리 알려져 저처럼 마음속 꿈을 품고 있던 분들이 많이 참여하길 바랍니다.”
극 중 돌쇠 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하며 객석의 웃음을 이끌어낸 안은숙 씨의 소감 역시 뭉클한 울림을 준다.“평소 사회생활을 하며 본래의 내 모습과는 다른 ‘가면(탈)’을 쓰고 바쁘게만 살아왔어요. 그런데 이곳에 오면 그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순수한 저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마음껏 놀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동창회에 나갔더니 친구들이 ‘얼굴 표정이 왜 이렇게 밝아졌냐’며 깜짝 놀라더군요.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내 안의 활력과 빛을 되찾은 기분입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중 한 여중생은 "이번 연극으로 선비가 체면만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일반 분들이 이렇게 연극무대를 만든다는게 놀랍고 저도 기회가 되면 도전해보고 싶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일본인 역을 한 연기자의 친구라면서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 영주에 와서 적응이 힘들 줄 알았는데 이런 공연을 멋지게 해내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연습하는 동안 즐거운 시간이 된 것 같아 소개해준 저도 마음이 뿌듯합니다. " 고 전했다.
신중년의 삶을 깨우는 문화예술교육에는 ‘지속성’이 필요하다. 화려한 결과물로 눈길을 끌기보다 우리 지역민들의 이야기를 녹여낼 수 있는 이런 사업은 사회적인 공감과 지원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흔히 나이가 들수록 품위를 지켜야 하고, 목소리를 낮추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미덕이라 여긴다. 그러나 이번 마당놀이 현장에서 마주한 중년 여성들은 점잖은 침묵 대신 우렁찬 사설과 거침없는 몸짓으로 잃어버렸던 생의 기운을 무대 위에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소중한 문화적 치유와 변화의 장이 매년 공모 사업 선정 여부에 따라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점은 짙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현장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해마다 3~4월이면 사업 선정 결과를 기다리며 불안해하고, 홍보 통로가 넉넉지 않아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겨우 이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신중년 세대는 지역사회를 든든하게 지탱해 온 버팀목이다. 이들이 메마른 일상에서 벗어나 다시 ‘자신 삶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설 수 있도록 돕는 문화예술 치유 플랫폼에 이제는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더욱 안정적인 지원과 제도적 지속성이 확보되어야한다.
시대를 건너 진정한 나를 찾아 당당하게 걸어 나온 ‘마당나온 선비’들. 그들의 활짝 핀 웃음과 거침없는 발걸음은 우리 모두를 한층 더 따뜻하고 풍요롭게 물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