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 자리한 천운정(天雲亭,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제557호)과 종택 양진재(養眞齋)는 16세기 영남 사림의 학문적 깊이와 임진왜란의 국난 극복사가 고스란히 응축된 유교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천운정(天雲亭,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제557호)과 종택 양진재(養眞齋)
영주 시내 삼판서고택 인근 구학정(龜鶴亭)에 세거하던 백암(柏巖) 김륵(金玏, 1540~1616) 선생은 읍내의 번잡함을 벗어나 학문 수양과 만년을 도모하고자 1598년 이산면 석포리로 거처를 정하여 천운정을 건립하고 동포서당(東浦書堂)과 살림집인 양진재(養眞齋)를 건축하였다.
천운정(天雲亭,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제557호)
'천운정'이라는 당호는 송대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 중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天光雲影共徘徊)"라는 명구에서 비롯되었다. 사림이 지향한 맑고 티 없는 심성 수양의 경지를 담아낸 이름으로, 정자 전면에 걸린 힘찬 필치의 현판은 당대 최고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친필이다.
천운정은 풍우로 퇴락했던 것을 1762년(영조 38) 현 위치로 옮겨 중건했으며, 정자 앞마당에는 네모난 인공 연못을 조성하여 군자의 절개를 상징하는 연꽃을 심었다. 백암은 말년을 천운정에서 지내다가 세거한 후 차자인 번계 김지선(1573~1622)이게 세전되었다.
퇴계 이황의 문인인 백암 김륵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관군이 와해되고 지방 수령들이 앞다투어 피란길에 오르자, 조정은 학봉 김성일을 경상우도 초유사로, 백암 김륵을 영남좌도 안집사(嶺南左道 安集使)로 임명하여 무너진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총괄하도록 명했다.
1592년 6월 1일, 적진을 뚫고 안동에 당도한 김륵은 도주한 안동부사를 대신해 예안현감 신지제(愼之悌)를 임시 안동부사로 전격 발령하고, 관내 향촌 유림과 원로(父老)들을 긴급 소집하여 각 고을의 수령 직무대리를 체계적으로 지정했다. 이로써 마비되었던 행정망이 전격 복원되었고, 흩어졌던 장정과 사림들이 조직적인 의병으로 창의(倡義)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안집사 김륵이 안동에 당도하자 비로소 백성들이 국가의 조정과 법령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깨닫고 의병을 일으켜 관무에 복종했다."
훗날 경상도 관찰사와 삼사(사헌부, 홍문관, 사간원)의 장을 모두 역임하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추앙받은 백암의 실천적 리더십은 향촌을 넘어 나라를 구한 방파제 역할을 담당했다.
천운정 본채인 양진재를 건립하고 마을의 기틀을 확립한 인물은 백암의 차남 번계 김지선이다. 그는 성균관 사마시(司馬試) 생원과에서 전국 1등(장원)을 차지하며 가문의 학통을 입증했으나, 대과를 통한 중앙 관직 진출(의금부 도사 제수)에 연연하지 않고 향촌의 자치 기반을 닦는 데 평생을 바쳤다.
김지선의 탁월한 공적은 지형을 바꾼 대규모 치수(治水) 및 간척 사업이었다. 당시 양진재 앞을 가로지르던 내성천 지류는 잦은 범람으로 인해 일대를 농사가 불가능한 늪지대로 방치하게 만들었다. 김지선은 사재와 인력을 동원해 물길을 외곽 산 밑으로 우회시키는 대역사를 단행했다.
물길을 돌려 비옥하고 광활한 평야를 개간해 내자, "시냇물이 마을을 울타리처럼 감싸고 흐른다" 하여 울타리 번(樊) 자와 시내 계(溪) 자를 써서 마을을 '번계(樊溪)'로 명명하고 넓은 들판을 '번계들'이라 칭했다. 현재 번계마을에 세거하는 주민의 대다수가 바로 이 번계 김지선 선생의 후손들이다.
천운정의 역사는 한국 서원사(書院史)의 중핵인 영주 이산서원과 뗄 수 없는 구조적 결속 관계를 지닌다. 이산서원은 1558년 군수 안상(安瑺)이 퇴계 이황의 자문을 받아 건립한 영주 최초의 서원이자 우리나라 여섯 번째 사액서원이다.
한국 서원사에서 이산서원이 지니는 3대 독보적 위상
1. 한국 서원 규약의 효시(嚆矢):
- 중국 백록동서원 규약을 탈피하여 퇴계 이황이 한국 현실에 맞게 최초로 제정한 '이산서원 원규(院規)'
-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서원 원규의 표준 모범으로 전파
2. 퇴계 이황 최초 배향(享祀) 서원:
- 1570년 퇴계 서거 후, 1573년 도산서원보다 앞서 퇴계의 위패를 제1위로 봉안
3. 퇴계 『성학십도(聖學十圖)』 목판 판각 및 민간 보급의 발원지:
- 소고 박승임의 재정 지원으로 이산서원에서 목판 판각 제작 및 간행
백암 김륵은 문과 급제 전인 유생 시절부터 이산서원의 원장을 맡아 사재를 털어 사당을 짓고 서원을 완공하는 데 헌신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서원이 훼손되자 1615~1616년 서원을 영주 시내(구성원)에서 번계마을 인근으로 이건하도록 주도했다. 당시 김륵은 이건 경비를 전액 부담하겠다고 결단했고, 차남 김지선이 원장을 맡아 강당을 새로 짓고 공사를 완수하여 성대한 낙성식을 치렀다.
1970~2010년대 영주댐 건설로 서원이 수몰 위기에 처했을 때도 가문의 수호 의지는 빛을 발했다. 수자원공사와 당국이 다른 문화재들과 묶어 종합 관광단지로 이전하려 하자, 김태곤 선생의 선친은 "서원은 선현들의 강학 터전이자 천운정와 결속된 공간이므로 관광지로 집단 이주해서는 안 된다"고 완강히 거부하여 번계들이 내려다보이는 현위치 인근 야산으로 이건 터를 확정 지었다. 이산서원은 2021년 11개 동 전체 건물이 완벽히 복설되어 퇴계 이황, 소고 박승임, 백암 김륵 삼현(三賢)을 모시는 도학의 도량으로 복원되었다.
400년을 관통한 국가급 기록유산과 명품 유물
천운정과 양진재는 수백 년 세월 동안 전란과 화마 속에서도 단 한 번의 유실 없이 귀중한 왕실 하사품과 전적류를 온전히 보존해 왔다. 안전한 영구 보존과 학술 연구를 위해 현재 핵심 유물 3,000여 점은 한국국학진흥원과 영주 소수박물관에 안전하게 기탁(寄託)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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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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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성격 및 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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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학술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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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聖學十圖)』 교서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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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교서관 인쇄본
(금속활자 갑인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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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진흥원 소장본 중에서도 극히 드문 국가 지정문화재급 최초 간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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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방목(司馬榜目)』 (초주 갑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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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정 발행 과거
합격자 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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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계 김지선이 생원과 전국 1등(장원)으로 등재된 1급 국가 공인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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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 한호 친필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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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雲亭' 목판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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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조선 최고 명필의 서풍이 완벽히 보존된 누정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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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신종(만력제) 하사
호연(壺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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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황실 하사 고급 어묵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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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의 사신 활동 및 조·명 외교사를 실증하는 국보급 공예 유물 (소수박물관 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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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 김륵 패도(佩刀)
및 총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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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용 도검 2점
(전체 98.5cm,도신 72.2cm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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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영남좌도 안집사로서 군무 지휘와 방어에 사용한 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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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년 예장지(禮狀紙·건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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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이씨 가문과의 혼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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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이상 원형을 보존한 조선 중기 사대부 혼례 문화의 1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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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聖學十圖)』 교서관본

『사마방목(司馬榜目)』 (초주 갑인자)
석봉 한호 친필 편액
명 신종(만력제) 하사 호연(壺硯)
백암 김륵 패도(佩刀) 및 총포신
)건서지·禮狀紙(년 예장지1591
천운정이 자리한 이산면 일대는 단일 가문의 세거지를 넘어 반경 2km 이내에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명문가와 거유(巨儒)들의 유적이 밀집된 복합 역사문화 생태계이다.
- 우금마을 (두암고택·함집당): 반남박씨 집성촌으로 단일 마을에서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했다. 조선 중기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은 문집에서 "영천(영주)의 공론은 우금 사랑방에서 나온다"고 기록했을 만큼 영남 사림의 여론을 주도했던 학문의 중심지이다.
- 이르실(일우정·대암정사·송석헌): 옥천전씨와 안동권씨가 세거하며 도학 수양과 학문 교유를 이어온 유서 깊은 서원형 정사이다.
- 성이성(成以性) 유적과 신암리 마애삼존불: 『춘향전』 이몽룡의 실존 모델로 규명된 청백리 성이성의 정자와 묘소, 그리고 고대 교통로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하는 통일신라 보물 신암리 마애삼존석불이 지척에 분포한다.
- 야일당(野逸堂)과 까치구멍집: 백암의 3남 및 4남 가계가 일군 고택으로 반가 건축과 서민 초가 양식이 어우러진 귀중한 민속자료이다.
14대 주손 김태곤(金泰坤) 선생님
현재 천운정과 양진재를 지키며 영주향교와 이산서원의 유림 공무를 이끌고 있는 14대 주손 김태곤(金泰坤) 선생은 고택과 전통문화를 대하는 확고한 철학을 담담히 풀어냈다.
"조상들이 400~500년 동안 온전히 물려주신 이 집과 정자는 결코 내 개인의 재산이 아닙니다. 문중과 역사 공동체의 자산이며, 나는 그저 훼손 없이 보존하여 다음 세대에 넘겨줄 의무를 지닌 '관리인'에 불과합니다. 조상의 유산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김태곤 선생은 목조 건축의 생명력에 대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 터득한 통찰을 전했다. 사람이 살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그면 목재가 숨을 쉬지 못해 급속도로 뒤틀리고 부식되지만, 사람이 거주하며 매일 문을 여닫고 온기를 불어넣을 때 비로소 수백 년의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설명이다. 박제된 문화재가 아닌, '인간의 일상이 깃든 보존'이 핵심이라는 지적하였다.
영주 이산면의 천운정과 양진재, 그리고 이산서원은 안동에 결코 뒤지지 않는 영남 성리학의 발상지이자 실천적 도학의 본산이다.
영주 선비문화가 일회성 소비 관광의 함정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정신문화의 거점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첫째, 천운정-양진재-이산서원-우금마을을 잇는 '이산 유교 문화유산 벨트'의 체계적 학술 조사와 심화 답사로 구축이 시급하다. 둘째, 이산서원 원규의 제정 의의와 성학십도 판각 역사를 재조명하는 학술 연구 지원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셋째, 고택을 온몸으로 지켜내는 종손들이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도록 실질적인 방재 및 위생 인프라 공적 지원 체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천운정 앞 연못에 비치는 맑은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처럼, 선조들의 학문과 절의를 굴절 없이 지켜 후대에 올곧게 물려주는 김태곤 선생의 묵묵한 걸음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선비정신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이 글의 자료와 일부 사진은 김태곤 선생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